☆☆...... 안 보이는 건 언론 통제...... ☆☆
# 그래 좋기만 하겠다
그래 좋겠다 퍽이나 좋겠다
사랑처럼 좋겠다
가을이 오는 길 가장자리에서 빨간 잠자리는 좋겠다
산다는 건 그리 아름다우려니 말만 들어도 좋겠다
저녁에 찬 바람이 일어 상수리 넓은 잎이 바스락!
다람쥐 나무에 올라 쫑긋거리네
그래 좋겠다
너는 좋겠다
사랑이나 하렴 그래야 좋겠다
저 윗골 두메산골 내 그리움 사는 곳
등허리 달락대던 책 보따리 혹여나 낡은 양은 도시락 안에 갇힌
젓가락 숟가락 소리
둔덕에 내밀던 작은 얼굴 이름 없는 풀뿌리가
안타깝던 날,
사랑아, 내 사랑아, 가진 것 하나 없던 사랑아!
뽀얀 우윳가루 한 됫박 풀풀 날려
으악새 옆구리처럼 휘어지던 너와 나, 그 오랜 기억들아!
사라져라, 그래야 나는 좋겠다
너와 가지런히 좋겠다 사랑하며 좋겠다
야아호!! 사라지는 뒷마당 돌담길에 밤나무 악을 쓰는 소리들
떨어지는 밤송이들
나 그 가시에 찔려 아직은 독이 풀리지 않는다
내 어린 날 모르고 지낸 시간들아,
『세상(世上) 속으로』
누군 되구 누군 안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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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 반란 지지를 얻기위해 찾아온 박정희를 외면하는 김창숙 지사 © 인터넷 |
선생, 나, 옛날에 독립군 때려 잡은 거 반성하는데...
3. 어느 人生 하나
"인생은 결핍!"
그가 말했다.
"나만 좋고 편하면 그만인데
수단 방법을 가려선 뭣해!"
아이가
따라서 말을 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면 돼
파라다이스 별게 아냐"
낄, 낄, 낄,
지나가던 개가 웃었다.
Alone on the Road (나홀로 길을 걷네) - Anna German
☞ 아이고 추워라 ☜
어디까지 부딪혀 갈거나
쇄빙선 갑판 위에 서서 굽어본다
빙산조각들...
타~앙!
태고를 입히다만 그림 위에
북극곰이 아랫배를 움켜잡고
흐흐흐, 세상사 그런 거여!
작은 바닷가 바람 부는 언덕에
울려 퍼지는 그들먹한 미소 한 자락
흐흐흐, 감당은 해야지
큰 미소 작은 미소
『 잘못된 희망과 의지가 상처를 남긴다 』
- 노래와 산문 : daum cafe 쉘부르의 한들 가든님
아~아~
낭만과 자유와 민주화를 위해
막걸리에 밥 말아먹었던
젊은 날의 시절은 어느새 옛말이 되었고
칼칼하고 매콤한 최루가스의 향기가
다시금 그리워지는 게 웬일입니까?
80년 어느 날
부산 양정의 15P 헌병대에 끌려가 구두약에 취한
워커 발 맛이 알싸하게 서글퍼지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도둑놈 사기꾼 전과자 양아치들이
정치권력에 휩싸여 얍쌉한 헛웃음 흘리며
한 표 동냥 한다고 저마다 거짓말 창조대회에
설쳐대는 꼬락서니가 가관인 작금의
이 시절에 뽀빠이 라면땅 자야 생각이 간절합니다,
증기 기관 완행열차의 헉헉거림으로 간신히
추풍령 고개를 넘어 대전역에 도착하면 가락국수
국물 맛에 지루함을 잊으며 살아왔건만
온갖 잡것들이 설쳐대는 동방의 해 돋는
이 나라는 망쪼가 들어가는지 날마다
정신이 시끄러워 해괴망칙 합니다,
이맘때쯤에
영웅 이순신 장군님도 제주도에 오셔서
한 5년만 거북선을 몰아주시고
하된 공화국, 나할 제국의
국가재건위원회와 국보위 창시주 께서도 한 5년쯤
라이방 끼고 파이프만 물어주시면 댓낄인데
아! 참
염라대왕님!
저승사자님은 요즘 휴가 가셨나요?
눈썹하나 흐트림 없이 새빨간 거짓말로 정치 놀음판에
비쌍피 똥팔광 하는 년놈들 모두 한 5년만 끌고 가주셨으면
얼매나 좋겠노 이말입니다요,
어!~~~
벌써 술이 떨어졌네, 시바 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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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그 내면의 풍경


2012/10/28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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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사격장에서 표적을 겨냥하는 박정희. 한겨레 제공 |
도올 김용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근혜씨가 여당 후보로 출마한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펴낸 책 <사랑하지 말자>에서 박정희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개했다. 10월유신(1972)과 10·26 사건(1979)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자의 동의를 얻어 요약해 싣는다.
배신과 이상의 두 얼굴
박정희(1917~79)에게는 형이 4명 있었는데, 셋째 형 박상희(朴相熙·1906~46)의 영향을 어려서부터 많이 받았다.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에 다닐 때, 20대의 건실한 청년 박상희는 (경북) 구미 지역에서 민족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한 큰 인물이었다. 그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뭉친 신간회(1927. 1~1931. 5) 활동을 했고, 구미면 동아일보 지국장을 지냈으며, 해방 후에는 구미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박상희는 소신 있는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박정희는 좌파 지도자인 형에 대한 존경심에서 자신의 인격과 삶의 비전을 키워나갔다. 그래서 박정희 삶의 뿌리에는 사회주의적 성향이 분명히 있다.
박상희는 친한 친구 황태성의 소개로 경북 김천의 한양 조씨 규수인 조귀분(趙貴粉)을 아내로 맞는데, 그 아내가 낳은 맏딸 박영옥이 바로 김종필의 부인이다. (즉 김종필의 장인이 박상희이다.) 박상희는 해방 후 민군정의 실정으로 일어난 1946년 10월의 이른바 '대구폭동'(식량난으로 민중이 일어선 정당한 항변이었기에 '대구민중항쟁'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외부에서 투입된 경찰들이 박상희를 총으로 쏴 죽인다. 그때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한 지 불과 일주일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평생을 존경해오던 형님의 쓸쓸한 3일장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비보에 대해 내색하지도 않았다. 그때 세태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자신의 인생행로도 복잡했다. 일제시대 때 "천황폐하에게 사쿠라 꽃잎처럼 깨끗하게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한 황군 육군 소위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박정희가 창씨개명한 이름. 엄밀하게 말하면 그는 만주군이었다)이던 그가, 이제 조선경비대(남한에 정식 국군이 생기기 전 미군정 주도로 창설한 군대)에 입대해 제2의 군인생활을 시작하려는 시점인 터라 어떠한 생각도 분노도 표출할 수 없었다. 복잡한 세태의 추이를 관망하며 분노의 심정을 가슴 깊이 형의 주검과 함께 묻어버렸다.
조선경비대 남로당 새포책 박정희
그 후 두 달 뒤인 1946년 12월 14일 (29살의) 박정희는 소위로 임관했다. 1947년 9월 27일에는 중위도 거치지 않고 대위로 승진했고, 1948년 8월 1일에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당시로서는 그런 식의 (초고속) 승진이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군인으로서 박정희는 인품이 있고 탁월하게 유능했다. 한편 박정희는 공산당 남로당원으로서 세포조직의 중책을 맡아 조선경비대의 조직 속에서 이른바 '빨갱이'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오늘날 우파 권세가들의 정신적 지주이며 직접적 뿌리인 대부 박정희 본인이 공산당원이었고, 좌파혁명의 꿈을 꾸던 사람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가 현대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우선 이런 문제부터 짚어보자! 일제시대 때 우리나라 사람들 스스로에 의한 군대는 있을 수 없었다. 군인이 있다면 일본 군대로 징병 나간 사람들이나, 중국 대륙에서 공산계 밑에서 활약한 홍군이거나 조선의용군, 동북항일연군, 그리고 장개석 계열의 지원을 받는 임정 광복군이 있었을 것이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우리에게 찾아온 최대 비극이란 해방의 주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히로시마의 '피카-톤'(원폭이 터진 그 순간을 일본 사람들이 묘사하는 말) 때문에 그냥 도둑같이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결국 북쪽은 친소 도둑이 처먹고, 남쪽은 친미 도둑이 처먹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1948년 8월 15일의 일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기쁜 사건이 아니라 슬픈 사건이다. 김구나 김규식, 여운형과 같은 위대한 지사들이 그토록 염원한 단일조국의 꿈을 깨고 남·북이 각자 세력의 아성을 구축한 사건일 뿐이다. 이승만이 정부 수립을 강행하자, 연이어 9월 9일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드디어 분단국가가 되고 만 것이다. 자, 박정희가 조선경비대의 소령으로 임관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 수립이 선포되기 14일 전이었다. 생각해보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해인 1947년 7월 19일에 3·1운동의 진정한 리더, 조선건국준비위원회·근로인민당의 수뇌이던 여운형이 피살된다. 그 배후는 뻔한 것이다. 그리고 정부 수립 다음해인 1949년 6월 26일 애국자 김구가 암살된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존 하지 사령관은 민군정의 폐지를 발표한다. 김구는 일찍이 외군 철퇴를 주장했다. 김구가 피살되었을 때 미군 철퇴가 완료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었다는 것은 국가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통치체제가 갑자기 증발해버린 것이다. 국민은 식민통치가 끝났다고 좋아 날뛰며 길거리로 쏟아져나와 만세를 불렀지만, 그 해방의 사건이야말로 우리나라의 모든 비극을 불러올 수 있는 공백의 사태라는 것을 염려하는 사람은 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온 여운형이나 소수 애국지사들밖에는 없었다.
하여튼 국가가 없으니 '국군'이 있을 수 없다. 국군이란 '국가의 군대'란 뜻이다. 따라서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은 조선 경비를 위해 1946년 1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그해 6월 이름을 '조선경비대'로 바꾼다. 또 조선경비대 유지를 위해 '조선경비사관학교'라는 간부 양성 속성과정을 만들어 장교를 임관시켰다. 박정희를 '육사 2기생'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경비대에는 만주군·일본군의 군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대거 진출할 수밖에 없었고, 박정희는 그 부류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우수한 군인이었다. 더구나 그는 만주군관학교 2년의 본과 과정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육사 유학생대를 3등으로 졸업한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조선경비대로 몰려온 사람들 중에는 일본군·만주군뿐만 아니라 항일투쟁의 기나긴 역정 속에서 훈련받은 좌파 계열의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조선경비대에는 거칠게 말해서 '백계'(우익)와 '빨계'(좌익)가 반반씩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경비대는 일본 경찰 출신이 장악한 경찰 조직의 보조 병력 정도로 간주되었다. 이런 현실에 불만을 품은 많은 경비대 장교들이 조선인을 탄압한 친일 경찰 프락치(끄나풀)들이 날치는 세상에 대해 반체제적 사유를 한다는 것은 결코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미국을 상대로 싸운 일제(출신)의 군인들에게는 골수에 사무치는 반미 감정이 있었다. 미군정을 빙자해 놀아나는 모든 집권세력에 대한 저항 심리가 있었다. 백계 출신의 박정희가 빨계의 활동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태였다.
동지들을 넘겨주고 살아남은 박정희
박정희가 남로당원이 된 이유는 명약관화하다. 일제 막바지에 일본 장교의 꿈을 꾸었다가 일본이 패망하자 시무룩하게 빈둥빈둥 나날을 보내던 그는 1946년 9월 24일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해, 바로 존경하는 형 박상희의 죽음을 맞는다. 그해 12월 23일 남조선노동당이 정식으로 결성되고, 남한 적화공작을 하는 데 박상희의 친구들이 대거 참여한다. 그들 처지에서 박정희는 포섭 대상 제1호였다. 박상희가 피살된 후 그의 유족들을 보살펴주어 자연스럽게 박정희는 그들의 조직망에서 중책을 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1948년 4월 3일 4·3 제주 민중항쟁이 발발했다. 이 항쟁의 진압 명령을 받은 여수 주둔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여순 반란사건'이다. 이 사건은 '여수·순천 항명사건'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동족상잔이냐, 항명이냐 하는 택일의 기로에서 그들은 항명을 선택한 것이다. 차마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었다. 이 항명의 주체는 빨계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군 내에 좌빨이 퍼져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결국 여순 항명사건으로 국군 내 거대한 숙군의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박정희 소령이 검거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박정희는 당시 고문도 심하게 당했다. 그는 1948년 11월 11일 남로당 가입 등의 죄목으로 군 수사 당국에 체포되었고, 빨갱이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이와 같은 중형을 선고받은 군인 가운데 구명된 경우는 오직 박정희 한 사람뿐이다.
박정희가 살아남은 것은 변절의 대가이다. 그를 살린 사람은 당시 최고 요직에 있던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이었다. 박정희는 목숨을 구걸했다. 박정희보다 3살 어리지만 만주군의 선배였던 백선엽 중령은 그에게 정확한 목숨의 대가를 요구했다. 박정희는 살기 위해 그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박정희는 군조직 내의 '좌빨세포들'(그들은 실제로 의식 있는 우국지사였으며 박정희의 동지였다)의 상세한 명단을 공개했다. 박정희의 자술서로 우리나라 군대 내의 유능한 인물들이 수도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이슬의 대가로 박정희는 목숨을 건졌다.
박정희는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이었고, 결의와 결단이 있는 인간이었으며, 성취를 향한 자기 디시플린이 있는 인간이었다. 미래를 향한 발돋움을 성취하기 위해 그는 항상 자신의 현재를 왜곡했다. 현재 삶의 상황이 미래적 이상과 불일치를 일으킬 때, 그는 항상 자기가 품었던 이상을 배반했다. 그리고 서바이벌의 본능을 발휘했다. 그의 인생은 변절과 굴절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했다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말도 자신의 생애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그의 삶에 침을 뱉어줄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다.
한국전쟁은 박정희에게 구원의 사건이었다. 한국전쟁 발생으로 경험 있는 장교가 절실한 상황이 되자 박정희는 소령 계급장을 다시 달았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날 그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10월 25일 신설된 9사단 참모장이 되었고, 1951년 4월에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53년 11월 25일 준장으로 진급했다. 1955년에는 제5사단장이 되었다. 그는 비로소 전투부대 지휘관이 되었고, 젊은 장교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 자리를 잡았다. 박정희 삶의 하중이 비록 변절과 굴절을 거쳤을지라도 이승만 치하에서 부패한 군상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이상주의적 가치관의 무게를 (젊은 장교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적 이상 남아 있던 박정희
이승만은 군 수뇌부를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충성하도록 교묘하게 조작하는 능력이 있었다. 자유당 시절, 군대는 정말 개판이었다. 군납 물자를 둘러싼 부정의 도수는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을 뛰어넘는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 내의 소장파 장교들 사이에서 군대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 정군운동의 중심에 박정희가 있었다. 그리고 5·16 쿠데타는 멋들어지게 성공했다.
박정희의 쿠데타가 사전에 미국과 협의가 없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당시 쿠데타에 대한 미국 대사관의 보고를 보면, 5·16 쿠데타를 '좌익정권의 등장'으로 규정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박정희는 주체 없는 우리나라 역사의 꼬락서니에 대해 극심한 불만이 있었다. 우선 그는 이승만과 같은 '예수쟁이'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미국을 로고스의 전당으로 칭송하는 이승만과 같은 멘털리티(사고방식)는 없었다. 그는 일제 사범학교 출신이다. 교사로서 도덕적 인격이 무엇인지에 대해 혹독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일본 군인이었다. 그 나름의 로직에 따라 어떤 인격의 철저성을 배워간 디시플린 과정을 우리는 인정할 수도 있다. 하여튼 혁명가 박정희의 가치관 속에는 사회주의적 국가 재편에 대한 어떤 갈망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박정희는 군사혁명을 일으켰을 때도 분명 좌빨 성향이 있었다.
공화당의 박정희와 민주당의 윤보선이 맞붙은 민정이양 대통령 선거일을 불과 이틀 앞둔 1963년 10월 13일, 당시 야당 정통지로서 명성을 드날리던 <동아일보> 호외 하나가 서울 시내 중심가에 뿌려졌다. 박정희가 빨갱이라는 것을 폭로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여순 반란사건 이후 군법회의에서 박정희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한 내용이었다. 나도 내 손으로 그 호외를 받은 기억이 있다. 국민이 얼마나 경악했을까? 그런데 윤보선 같은 정통파 정치인이 박정희를 일제의 군인이며 새빨간 공산주의자라고 폭로했을 때 국민들은 윤보선을 지지했을까? 오히려 국민들은 '빨갱이' 박정희를 선택했다. 전라도·경상도 지역에서 박정희가 우세를 보인 지역은 예외 없이 좌익활동이 왕성했거나 좌익연좌제로 피해를 본 지역이었다. 민중은 윤보선의 폭로를 오히려 매카시즘류의 야비한 공세로 낙인찍은 것이다.
한국의 보수세력 속에도 뼛속 깊은 곳에 숨겨진 좌빨들이 많을 수도 있다. 당시 민중은 스펙 좋은 윤보선의 허울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군사혁명 세력의 참신한 붉은 색깔을 좋아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박상희의 동생이 남조선을 뒤엎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그래서 박정희와 직접적인 커넥션이 닿을 수 있는 인물을 모색했는데, 그가 바로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 황태성이었다.
황태성을 죽이고 과거와 단절한 박정희
황태성은 해방 전에 연희전문을 2년 다니다가 중퇴한 인텔리로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조직부장으로서 대구 지방에서 활동했다. 그는 당시 대구 남로당 간부였던 박상희와는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박정희를 조선경비대 남로당 조직원으로 포섭한 이재복(李在福·평양신학전문 졸업)과 함께 셋이서 10월 대구 민중항쟁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황태성은 박상희가 피살되고 대구 민중항쟁이 진압되자 도주하여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의 측근이 됐다. 월북한 뒤에는 북한 정권의 무역성 차관에까지 승진했다가, 박헌영 실각 후 해임되었다. 김일성은 황태성에게 박정희에게 평화통일을 제안하는 비밀협상 임무를 맡겼다. 황태성은 김일성에게 "박정희는 내가 어려서부터 세배도 받고 머리를 수없이 쓰다듬어주던 아이이므로 직접 가보겠다"고 나선다. 황태성은 최소한 자기만은 다치지 않고 다시 북환에 귀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1961년 9월 1일 임진강을 건너 서울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다.
황태성은 1963년 12월 14일 토요일 오전 11시 20분, 인천 근교의 한 육군 부대 안에서 총살형이 집행돼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그 유명한 '황태성 간첩사건'의 시말이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는 그에게 내밀어진 사형집행 승인 서류에 사인하기를 주저하고 또 주저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아까운 분인데! 아까운 분인데…" 했다. 자신이 인간적으로 숭배한 형님의 가장 절친한 친구, 그리고 이 민족의 지도자로서 결코 흠 없이 살았던 황태성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악연을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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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하며 눈물을 흘리는 박정희. 한겨레 제공 |
황태성은 남한 침투 후 제일 먼저 자신의 친구로서 대구 민중항쟁의 동지였던 김성곤(金成坤·1913~75·쌍용그룹 창업자)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가 유럽여행 중이라 만날 수 없게 되자 대구로 내려가 박상희의 아내 조귀분의 집으로 갔다. 황태성은 놀란 조귀분을 설득했고, 조귀분은 사위 김종필에게 황태성을 데려갔을 것이다. 박정희·김종필·황태성, 이 세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담론을 즐겼을까?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김종필과 황태성이 함께 공화당을 사전 조직했으며, 황태성이 공화당 비밀요원의 밀봉교육을 담당했다. 그가 철저한 마오쩌둥류의 당 우선 대중노선을 가르쳤다는 등의 이야기는 학생들의 서클실 담론의 흔한 주제였다. 이런 얘기는 김형욱의 회고록 등에도 나타난다. 하여튼 황태성은 반도호텔에 상당 기간 유숙했으며, 박정희도 황태성을 예우했음이 틀림없다.
박정희가 황태성을 죽인 것은 곧 자신의 형 박상희를 죽인 것이다. 형 박상희를 죽인 것은 곧 자신의 과거를 죽인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죽였다는 것은, 이 경우 북한과의 모든 인연을 단절하겠다는 것을 표명했다. 이런 의지 표명만이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서 인간 박정희가 생존해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결국 황태성은 미국이 죽인 것이다. 미 수사 당국이 황태성 간첩사건을 집요하게 추궁했고, 황태성의 신병을 2주 동안 넘겨받아 필요한 정보를 모두 빼갔다. 박정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박정희는 조선경비대 남로당 조직 친구들을 죽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활로를 개척했고, 또다시 황태성을 사형에 처함으로써 활로를 마련했다. 이것은 박정희 생애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동일한 패턴이지만, 박정희의 개인적 변절이라는 차원을 떠나 박정희가 비애롭게 굴종해야만 했던 우리 시대사의 굴절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분명 쿠데타를 일으킬 때는 참신한 사회주의적 사고까지 포섭했을지 모르지만, 황태성을 죽인 후부터는 철저히 친미·친일 우익의 매판자본 경제발전의 활로를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간다.
우선 내가 박정희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통해서 남북의 역사가 서로를 소외시킬 수 없는 하나 된 몸이며 그 역사의 진로가 서로에게 한정성을 예시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이 없으면 우리가 발해를 잃어버린 것처럼 북녘땅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제 우리는 남북의 역사를 근원적으로 초극하는 새로운 통합적 관점이 필요하다.
박근혜는 박정희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박정희를 안다는 것은 박정희 삶의 사건들을 안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삶의 사건들에 얽힌 역사 전반을 통관할 줄 알아야 한다. 또 그 사건들의 내면에 흐르는 박정희 본인의 생각과 느낌과 신념과 원칙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박근혜나 우리에게 똑같이 객관화되어 있는 인식의 지평이다. 더구나 자식들은 어버지나 어머니의 생애를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을 객관적 앎의 대상으로 소외시킬 수 있는 감정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 자식은 부모를 무개념적 느낌 속에서 일차적으로 파지하며, 그 느낌은 역사의 일반 개념 속에서 보편화되지 않는다. 박정희는 신념의 사나이였고, 원칙의 사나이였고, 삶의 디시플린이 있었고, 또 이상주의가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는 이런 아버지의 정신세계를 하나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최후의 시간, 최후의 안식
나는 박정희의 최후 순간을 같이한 여가수와 오랫동안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안가에 심수봉(沈守峰)은 기타를 들고 박 대통령의 왼쪽에 앉아 있었다. 당시 상황에 관해서는 여러 진술이 있다. 나는 단지 심수봉에게 들은 것만 옮기겠다.
"대통령께서 저에게 <그때 그사람> 한번 불러보게 하시기에 그 노래를 다 부르고 나서 신재순이가 <사랑해 당신을>을 불렀는데, 너무 못 부르자 박 대통령께서 도와주시느라 함께 흥얼거리셨죠. 그리고 제가 기타 반주를 해드렸고요. 그때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빠앙~' 총소리가 난 거예요."
"총성은 그냥 갑자기 난 것이었어요.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에 구멍이 뻥 뚫렸어요. 난 손목에 그렇게 큰 구멍이 뚫린 건 처음 봤어요. 순간 차지철은 화장실로 도망갔어요. 총이 없어서도 그러했겠지만 아마도 다음 총알이 각하에게 날아가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겠죠. 하여튼 경호를 맡은 사람의 행동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 순간 '이런 장면을 각하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고 놀란 가슴을 누르며 바로 옆을 쳐다보았지요. 각하는 총소리에 조금의 동요도 없이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계셨어요. '이 녀석들이 또 철없이 난동을 부리는구나' 하는 식의 태연한 모습이었어요. 이때 운명의 총알이 튀었지요. 오른쪽 가슴으로부터 왼쪽 아래 옆구리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아무런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로 그대로 위엄을 지키며 선승처럼 끝까지 앉아 계셨습니다."
"정적 속에서 심하게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본능적으로 대통령을 부축하면서 '괜찮으세요' 하고 물었지요. 그때 '괜찮아'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때 김재규가 다시 들어와 확인 사살을 시도했다가 총알이 없자 다시 새 총을 들고 들어와 가혹하게 대통령 머리를 겨누었지요. 박 대통령은 제 품에서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지금 디테일에 관한 검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박정희가 죽음의 순간에 모든 것을 예감하고 받아들이는 듯한 초연한 자세를 취했다는 것과, 그의 마지막 말이 "괜찮아" 이 한마디였다는 사실이다.
박정희를 이해한다는 것은 3선 개헌으로 유신정국에 접어들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는지, 그 민중의 신음 소리를 동시에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그토록 많은 학생들이 길거리에서 피를 흘려야 했고, 인혁당 사람들이 아무 죄도 없이 사형집행을 당해야 했으며, 비상계엄의 부마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박정희라는 태양의 폭염(<시경>(詩經)에서 '폭정'을 상징하는)은 너무 강했다. 당시 박정희가 제거되기를 갈망하지 않은 상식적인 인간은 없었다!
박정희는 위대한 전범을 달성하기에는 그가 치달린 삶 자체가 너무 왜곡돼 있었다. 3선을 넘어 종신 대통령을 꿈꾸는 유신으로 치달은 그는 이미 목이 잘린 항룡이었다. 항룡유회(亢龍有悔)! 항룡에게 남은 것은 후회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탄 자전거는 계속 페달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안 밟으면 쓰러지니까! 그러나 박정희는 그 지겨운 페달밟기를 누군가 멈추게 해주기 바랐을지도 모른다.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권세를 포기하는 용단을 내리지 못하는, 개인적 독락(獨樂)의 욕망 때문에 계속 굴러가야만 하는 자전거에 올라탄 자신을 그는 가련하게 관조했을지도 모른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조선경비사관학교 동기생으로 키도 같고 교사생활한 경력도 비슷하다. 박정희는 그를 아꼈고, 그를 중용했다. 그는 1964년 6·3 사태 당시 계엄군을 지휘해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
김재규는 의리가 있었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부마 민중항쟁 등 계속된 정국불안 사건들을 수습하면서 단 한 명의 권력자를 위해 더 이상 국민의 희생이 있어선 아니 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상식은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상식적 판단이 박정희의 종언을 가져온 것이다. 그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에 총부리를 겨누었을 때, 박정희는 그 총부리를 회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발악의 여유는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친구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을 쏜다면 기꺼이 그 총알을 받아들이겠다는 역설적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지도 모른다 ."친구여, 끝내주게! 나도 어쩔 수 없었네. 이제 그만 내 인생의 종막을 내리려 하네! 난 괜찮아!" 몇 초 안 되는 순간이지만 이런 대인의 교감이 오갔을지도 모른다.
박근혜는 아버지를 얼마나 아는가
박근혜가 어버지 박정희를 이해한다면 동시에 박정희의 심장을 쏜 김재규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친구의 총성을 기다리는 박정희의 모습에서 지친 해탈인의 모습과 역사 굴절의 톱니바퀴에서 희생당하고만 초라한 욕망의 화신, 그 두 면모를 동시에 본다. 도저히 우리 역사가 되돌아가야 할 지점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구국의 결단'을 운운하는 박근혜의 판단 능력은 인간학의 걸음마도 경험하지 못한 유치한 소녀의 푸념에 불과하다. 이제 아버지의 '구국의 결단'을 재현하기 위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인가! 거대한 박정희 동상을 세우고 그 밑에 전 국민을 집결시키겠다는 것인가!
글•김용옥
- 자료첨부(부마민중항쟁 시절)
출처 :I LIKE SOCCER (아이라이크사커) 원문보기▶ 글쓴이 : Urban Zakapa |
① 김호남 ② 이현란 ③ 육영수
[발굴] “박정희 동거녀 이현란, 아들 낳았다”
출처: ☞ → [발굴] “박정희 동거녀 이현란, 아들 낳았다” 클릭 → ★ [ 박정희와 그의 시대 ] ★ 2011/05/18 22:41 정운현
* 이 글은 5월 16일자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최근 집에서 자료를 정리하다가 한동안 행방을 몰랐던 편지 한 통을 우연히 찾았습니다.
편지 수신일자가 1999년 1월 19일로 돼 있으니 햇수로 12년이 넘었습니다.
편지봉투를 겉면을 보니 제가 보낸 편지에서 제 주소를 잘라 되붙였는데,
당시 저의 소속이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편집국 문화부’로 돼 있군요.
(* 98년 8월 10일부로 저는 중앙일보에서 대한매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이야기는 지금부터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박정희 일대기’ 연재를 하면서 만주군관학교 동창생들을 더러 인터뷰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군관학교 1기 후배인 최주종(작고, 육군 소장 예편) 전 주공 사장이었습니다.
최 사장을 만나러 반포아파트 자택을 방문했다가 숙군 당시 박정희와 함께 처벌받았던
김학림(金鶴林)의 부인이 일본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최 사장 부인에게서 들었습니다.
숙군 때 처형된 김학림의 아내 강 아무개씨가 필자에게 보낸 답장편지 겉봉투
숙군 때 유죄를 인정받은 점은 박정희 생애에서 오점 가운데 하나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얘기도 들어볼 겸해서 김학림의 아내 강 모씨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 질문내용은 남편 김학림의 구속 전후사정과 주변사람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뒤늦게 도착한 편지 속에는 뜻밖에도 놀라운 내용들이 상당수 많이 들어 있었는데,
주요내용은 김학림과 박정희의 관계, 박정희 동거녀 이현란의 출산 등이 그것입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 4학년 때인 1935년 여름 부친의 강권으로 억지결혼을 하였습니다.
당시 대구사범 교칙에는 재학생은 결혼하지 못하도록 돼 있어 비밀결혼을 한 셈이죠.
상대는 선산군 도개면에 사는 김호남(金浩南, 1920~1990)으로 그보다 세 살 아래였습니다.
두 사람은 부부 사이가 그리 원만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입학 후 여름방학이 돼 귀국해서도 처자가 있는 고향집 대신에
교사 시절에 머물렀던 문경 하숙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곤 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맏딸인 박재옥 씨와 남편 한병기 씨가 박 전 대통령 사진 앞에 서 있다
결국 두 사람은 1950년 11월 협의이혼 하였는데, 그 사이에 딸을 하나 두었습니다.
박재옥(朴在玉, 74)이 그 주인공인데, 박재옥의 남편 한병기(韓丙基, 80)씨는
3공 시절 민주공화당 국회의원과 UN대사 등을 지내며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박정희가 두 번째 부인인 육영수 여사를 만난 것은 한국전쟁 중이었습니다.
1950년 8월 하순 피난지 부산에서 송재천(宋在千) 소위의 소개로 맞선을 보았는데,
4개월 뒤인 그해 12월 대구 계산성당에서 허억 당시 대구시장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박정희-육영수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일화가 몇 가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우선 육 여사 부친의 불참으로 박정희의 대구사범 스승이 대신 신부를 인도했습니다.
또 주례가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이라며 신랑신부의 이름을 바꿔 불러
식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으며, 또 신부의 예물반지를 갖고 있던 송재천이 이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김재춘이 급히 나가서 새로 하나 사오기도 했습니다.
박-육 두 사람 사이에서는 근혜, 근영, 지만 등 2녀1남을 두었습니다.
1950년 12월 12일 대구 계산성당에서 열린 박정희-육영수 결혼식 장면
청와대 시절 박정희-육영수 부부와 세 자녀들
한편 박정희는 육영수와 결혼하기 직전에 한 여대생과 동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원산 루시여고 출신으로 당시 이화여대 1학년이었던 이현란(당시 24세)이 그 주인공인데,
이현란은 이국적인 외모에다 키도 크고 성격도 쾌활해 박정희 눈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이들 두 사람은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약 3년가량 사실혼 관계에 있었는데요,
1947년 12월 경리장교였던 박경원(朴璟遠, 작고)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박정희는 육군 대위로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현란과 약혼한 후 곧 이현란을 용산 관사로 데리고 와서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루돼 감옥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으며,
이후 이현란의 수 차례의 가출과 방황으로 인해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됐습니다.
박정희와 동거녀 이현란에 대해 그간 알려진 내용은 이 정도가 대부분입니다.
김학림 아내 강 아무개 씨가 보낸 편지 본문(6장)과 추신(1장)
김학림의 아내 강 모 씨가 필자에게 보낸 편지는 본문 6장, 추신 1장 등 총 7장인데
본문 가운데 박정희와 그의 동거녀 이현란 관련 부분을 골라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어느 날 신성모 국방장관의 명령으로 3개월만에 부산을 떠나서 저희는 태릉 육사(陸士)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살림집은 초가집 건넛방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생남(生男) 하였지만 군인 장교들이 초가집 건넛방에서 출퇴근 하였습니다. 순서대로 황택림(黃澤林) 고(故) 박정희도 초가집 건넛방에서 살았는데, 이대생(梨大生)이었던 이여사(李女史/이현란)가 매일은 아니지만 같이 살았었고, 그 다음에 박(朴)근서-숙청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그 다음의 군인 가족이 저희들이었고, 그 다음의 초가집도 장교였습니다.
이 동네에서 약 1년 쯤 지난 후에 명령으로 용산(龍山) 군인 관사로 이사했었는데 관사 입구 제일 가까운 데는 고(故) 강문봉(姜文奉)이 자리잡았었고, 고(故) 박정희, 황엽(黃燁) 장군, 저희들 세 식구는 깊숙이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었는데 이 때에도 이여사(李女史) 하고 고(故) 박정희는 아주 사이좋게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고(故) 남편과 고(故) 박정희는 태릉 초가집 동네에서 살 때부터 자주 만나는 것을 알았었는데, 고(故) 남편이 저한테 아무 얘기도 안하고 비밀로 한 것 같았었는데 나이도 어리고 아무 것도 몰랐었습니다. 그저 친구니까 친하게 지내는 걸로만 알았었습니다. 고(故) 남편이 이 관사에서 3일 동안 소식이 없이 집에 안돌아 왔었는데 이여사(李女史)가 저희 집에 와서 우리 남편도 소식이 없다고 하면서 걱정을 하였는데 나중에 체포된 사실을 알고 어찌 할 바를 몰랐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여사(李女史)가 출산(出産)하게 되어서 광화문(光化門)산부인과에 가서 생남(生男)하여서 제가 며칠 같이 있다가 퇴원하여서 이여사(李女史)는 육아(育兒)에 전념하였으나 약 6개월 후 병명(病名)은 몰랐었지만 사망(死亡)했었습니다. 작명(作名)도 안했었습니다. 그 때 이여사(李女史)가 한 말이 너는 무슨 기구한 운명으로 애비 얼굴도 모르고 죽었느냐고 하면서 슬피 울었었습니다.
그 후에 소문인데 신당동에서 재혼(再婚)하여서 자식 낳고 잘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또 소문은 이여사(李女史)의 남동생이 청와대 출입기자여서 이여사(李女史)의 소식을 고(故) 박정희에게 전하여 주고 서로 연락이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또 소문에 의하면 육여사(陸女史)하고 결혼하라고 중매를 했을 때도 이여사(李女史)의 미련(未練) 때문에 오랫동안(몇 年) 망설였다고 합니다. 이여사(李女史)는 미인(美人)이고 애교가 있고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김학림 대위
저는 관사에서 나와서 갈 곳이 없어서 태릉 육사 앞에 있는 육아원(育兒院)에 들어가서 보모(保姆) 노릇을 하다가 고(故) 남편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서대문형무소로 아이를 안고 면회(面會)를 갔었습니다. 고(故) 남편을 만?だ美뗌?묵에 메이고 눈물이 쏟아져서 말도 못했습니다.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 보길래 육아원에서 보모를 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 때 저의 아이를 안아본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고(故) 남편이 하는 말이 마는 주모자(主謀者)가 아니기 때문에 재심(再審)이 있는 데 그 때 풀려나가니까 걱정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공주(公州)로 이감(移監)했다는 소식을 듣고 1950년 6월 25일이 일요일이었으므로 원장(院長)에게서 외출 승낙을 얻어서 면회를 가려고 했었는데 사변(事變)이 나서 못갔으니 서대문에서의 면회가 마지막이 된 것입니다. 고(故) 박정희에 대한 저의 원한은 영원합니다...”
이어 덧붙인 ‘추신(追伸)’ 가운데 박정희와 이현란 관련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여사(李女史)의 사망(死亡)한 아이는 황(黃)장군 부인(고(故) 최 장군 부인하고 동창(同窓)인데 지금은 고인(故人)입니다)하고 같이 용산(龍山) 관사의 뒷산에 저녁때에 가서 암매장을 하였습니다.(입관(入棺)하여서)...”
이현란이 낳은 아이가 생후 6개월만에 죽자 용산 관사 뒷산에 암매장했다는 증언이 담긴 '추신'
위 편지내용과 관련해서 전후사정에 대한 설명을 보탤 필요를 느낍니다.
우선 강 모씨는 최주종 장군의 부인(이씨)과 만주 용정에서 같은 여고를 다녔으며,
백선엽(白善燁)의 권고로 1946년 12월 부산 중앙교회에서 김학림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강씨에 따르면, 남편과 백선엽은 ‘의형제’였으며 군인 관사에서 이웃해 살기도 했답니다.
부산 생활 3개월만에 김학림이 육사로 발령이 나면서 이듬해 봄 태릉으로 이사하였구요.
한편 박정희도 춘천 8연대 근무를 마치고 대위로 승진해 1947년 9월 육사로 옮겼는데,
당시 박정희(대위)는 제1중대장, 김학림(대위)은 제2중대 2구대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태릉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는데, 이 때 이미 박정희는 포섭됐던 것 같습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잠시 여순반란토벌사령부로 파견됐던 박정희는
육사로 복귀한 직후인 그해 11월 11일 김창룡이 지휘하는 방첩대에 체포됐습니다.
이후 남산 근방의 헌병사령부에서 며칠 취조를 당한 후 서대무형무소로 넘겨졌습니다.
한편 박정희는 체포되자마자 “이럴 때가 올 줄 알았다”며 자술서를 쫙 써내려갔는데,
평소 자신이 알고 있던 군부내 남로당 조직원 명단을 전부 털어놓았습니다.
군 수사당국은 이 명단을 통해 육사는 물론 군부내 좌익분자들을 대거 체포하였는데,
명단 제공 공로로 박정희는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도 목숨을 건졌습니다.
김창룡 팀으로부터 몇 차례 신문을 받은 후 박정희는 그해 연말에 석방됐습니다.
육사 중대장 시절의 박정희 대위
편지내용과 관련해 한 가지 덧붙이자면,
강씨의 편지 말미에 ‘고(故) 박정희에 대한 저의 원한은 영원합니다’라고 적었는데,
왜 원한을 가졌는지 궁금하나 편지만으로는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동거녀 이현란의 임신 및 출산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아이가 죽자 이현란이 ‘너는 무슨 기구한 운명으로 애비 얼굴도 모르고 죽었느냐’고 했다는
강씨의 증언으로 볼 때 이현란이 출산한 시점은 1948년 11월 중순~12월말 사이로 보입니다.
바로 이 기간동안 박정희는 좌익혐의로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사망한 시점이 생후 6개월이 지난 시점이라는 점은 의문입니다.
그렇다면 박정희가 구속되기 서너 달 전에 이현란이 출산을 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동거녀 이현란의 존재에 대해서는 박정희 생존 시절부터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 위 편지의 내용처럼 이현란의 남동생이 청와대 출입기자를 지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현란의 출산설에 대해서는 그간 어떤 사람도 이런 주장을 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씨의 증언이 구체적인 점 등으로 봐 믿을만한 사실로 추정됩니다.
출산한 병원명이나 사후 입관 여부 및 매장지 등을 자세히 언급한 점이 그것입니다.
혹 강씨가 아이의 정확한 사망 시점을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이현란 역으로 출연한 배우 김애경 씨(왼쪽)
생후 6개월만에 죽었고, 또 이름도 짓지 않아 호적에도 당연히 오르지 않았겠지만,
동거녀 이현란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핏줄이라면 그리 단순히 생각할 사안은 아닙니다.
30대 초반 청년장교 시절의 박정희는 이현란에게 빠져 지냈다고 해도 과인이 아닌데요,
그러던 둘 사이가 박정희가 좌익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면서 틈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이현란은 어려 차례 가출을 했었고, 박정희는 그때마다 찾으러 다니곤 했었습니다.
그 때 이현란이 낳은 ‘남아’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올해로 만 63세가 되는 데,
만약 그랬다면 이후 박정희 집안의 가계는 현재와는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80188 ← ★ 인터넷 통제로 사진이 안 보인다면 ★
http://blog.daum.net/beebeebeebee
습작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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