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20도에 나타난 페스트 곤충들, '악마의사'가 부른 한반도 세균전?
영하 20도에 나타난 페스트 곤충들, '악마의사'가 부른 한반도 세균전?
[(세균무기 개발을 위한) 새로운 노력은 원자폭탄 제조 프로젝트와 맞먹을 정도로 비밀리에 계획됐다. 세균연구 본부는 신속한 반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워싱턴에 충분히 가까이 있으면서도 세균으로부터 최소한의 안전을 보증할 수 있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메릴랜드의 옛 군기지 캠프 데트릭에 마련됐다](주디스 밀러 외 2인, , 황금가지, 2002, 42쪽).
위의 글은 미 기자 3명(주디스 밀러, 스티븐 잉겔버그, 윌리엄 브로드)의 함께 써낸 의 한 구절이다. 미국의 세균무기 개발노력이 마치 핵폭탄 개발만큼이나 무게감 있게 이뤄졌음을 말해준다. 원제목이 (2001)인 이 책은 2001년 9.11 테러 바로 뒤 미국인들을 공포에 빠트렸던 탄저균 테러 사건과 맞물려 널리 읽혔다(탄저균 테러에 대해선 연재 55 참조).
"보초병들은 일단 쏘고 나중에 질문하라"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미 연방정부는 워싱턴 북서쪽 70km 떨어진 메릴랜드주의 작은 도시 프레더릭의 데트릭 공항 문을 닫고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면서 공항 주변의 많은 땅을 사들여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였다. 그것이 미국의 세균부대가 자리잡은 캠프 데트릭의 출발이었다. 데트릭에 세균기지가 들어선 데엔 미 화학전 연구소인 엣지우드 병기창(Edgewood Arsenal)과도 멀지 않다는 이점도 작용했다.
이시이 시로(石井四郎)를 비롯한 731부대의 '죽음의 의사들'로부터 세균전 정보를 건네받으려고 미국이 1947년 가을까지 4차에 걸쳐 파견했던 조사관(세균전문가)들의 근무지가 바로 캠프 데트릭이다. 조사관들은 이시이 패거리들로부터 '피 묻은 세균정보'를 받아내려고 그들의 전쟁범죄를 묻지 않고 면죄부를 주는 '더러운 거래'에 앞장섰다. 주디스 밀러의 은 메릴랜드에 데트릭 기지가 들어섰을 때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세균)연구는 1943년에 시작되어 빠르게 확장됐다. 농촌지대의 촌스러운 군부대에서 갑자기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250개의 건물과 숙소가 들어섰다. 이 군부대는 방벽과 투광 조명들로 둘러싸여졌다. 보초병들은 일단 쏘고 나중에 질문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언제나 기관총에 탄약을 장전하고 있었다. 무장한 보초병들이 주야로 경계 근무를 섰다](주디스 밀러 외 2인, 42쪽).
핵개발에 버금 가는 대형 프로젝트
미 세균전 분야는 육군화학전국(局)이 맡았다. 기지의 구성원들은 박사급 연구원들을 포함한 장교 85명, 하사관 이하 373명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갈수록 규모가 커졌다. 1943년 4월 기지 공사에 들어갔고 공사 착공 3개월 뒤 전체 경비가 400만 달러를 넘어섰다. 당시 화폐가치에 견주면 엄청나게 큰 프로젝트였다. 그에 버금가는 것은 당시 핵무기 개발을 위해 로스앨러모스 사막 일대에서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던 '맨해튼 프로젝트' 뿐이었다(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210쪽 참조).
캠프 데트릭은 지금은 포트 데트릭(Fort Detrick)으로 일컬어진다. 1956년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의 미 국방부가 '평화 시기에 생물무기 연구를 하는 영구적 연구개발시설'로 지정하면서 이름을 살짝 바꾸었다. 우리말로는 똑같은 '데트릭 기지'다. 그 기지 안에 미국 육군생물학전연구소(USBWL)가 자리 잡았다. 1969년에 새로 출범한 미국 육군전염병연구소(USAMRIID)의 전신이다.
데트릭 세균기지를 세우게 된 배경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이다. 진주만 피습(1941년 12월7일) 다음해 여름인 1942년 8월, 미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미국도 세균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일본이 중국에서 생화학전을 펴는 것을 보면서, '미국도 세균전으로 손을 더럽힐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만주에서 이시이 시로가 '방역 급수'(防疫給水)를 내세워 731부대의 전신인 '도고(東鄕) 부대'를 꾸린 것이 1933년이었으니, 미국의 세균전 프로젝트는 10년쯤 늦은 셈이다.